촛불집회의 성격에 대한 짧은 단상

이전 정신병동 글들 2010. 5. 11. 16:00

오늘 6.10 촛불문화제 도중, 아무 생각없이 행진을 하고 있다가 행진의 맨 앞에서 나부끼고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명칭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황우석교수 지지모임'의 깃발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솔직히, 정말로 발길이 우뚝 멈춰버렸다. '내가 이 행진에 계속 참여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병자군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행진 초기에 한 시위참가자가 공공노조 깃발을 손으로 나꿔채며 깃발을 치울 것을 격렬히 항의하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내비두고 이리와라~" (병자군의 느낌에는, 마치 저것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뒤에 붙어서 따라오건 말건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있으나 없으나'한 존재이니까 그냥 무시해 버려라, 라는 뉘앙스가 느껴지는...)이었기에, 병자군의 개인적인 취향, 정치적 성향에 관계되는 의문이겠지만, '아니, 노조깃발은 용인 못하는데 저 깃발은 용인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로부터 약 10분 정도, 행렬을 빠져나와 인도에 서서 지나가는 모임들을 찬찬히 흩어보았다. 정말 깜짝 놀랄 만큼 다양한 깃발들이 지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다양한, 평소에는 전혀 섞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곳들이 서로의 깃발을 들고 한 대열 속에 섞여 있는 모습, 사실 극도의 '엘리트주의자'이며 '이념적 순혈주의자'인 병자군으로써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런 믿기지 않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만큼 이 촛불문화제의 초기 동력이며 가장 유력한 동력인 '미 쇠고기 수입' 이슈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념적으로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사람(단체)일지라도, 그야말로 '초딩'이 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한반도대운하 정도는 한번에 백 개 정도는 거뜬히 팔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삽질이라고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극도의 '엘리트주의자'이며 '이념적 순혈주의자'인 병자군의 입장에서, 여전히 이해가 힘든 부분이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긴 하다.

6.10
이후 지금처럼 분위기가 계속해서 고조되는 현상은, 최소한 그 상승폭만큼은 서서히 줄어들지 않을까, 라고 병자군은 생각한다. 새드개그맨님의 팟케스트 Forget the Radio 053. 촛불시위 정국은 어디로? 블로거좌담회 (1)에서도 보이듯이 이제 더 이상 새롭게 나올 사실이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점, 아직 6.15 효순미선사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6.10 민주항쟁만큼의 공통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좀 약한 계기라고 판단한다는 점, 촛불문화제의 주최측인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일정안내에도 6 10일 이후에는 아직 특별한 일정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 또 개인적으로는 이젠 일정한 강박으로까지 느껴지는 "평화"라는 구호의 힘에 의해 점점 흔히 말하는 '휘발성'이 배재되고 있다는 점 등이 병자군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이다. 그렇지만, 특히 오늘 집회의 규모나 특히 '명박바라기' 같은 이명박 지지모임도 지지철회를 고려하고 있으며  친박모임이 촛불문화제에 참여하는 상황까지 이른 지금에는, 이 시위는 어떠한 형태가 되든지 일정수준 이상의, 일부의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병자군은 크게는 하나로 연결된 두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럼 그 성공은 어느 정도 수준의 성공이 될 것인가?" 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성공 이후, 그러한 성공의 경험이 이 사회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이다.

비록 찬찬히 흩어보지는 못했지만 병자군의 짧은 관찰을 통해 발견한 촛불시위 참여단체의 그 다양한 구성 및 그로 인한 이념적 스팩트럼의 수준을 고려할 때, 그 성공의 수준은 작게는 '고시 철폐 및 쇠고기 재협상'일 것이고, 크게는 '이명박대통령의 하야'일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고시철폐 및 쇠고기 재협상 수준에서 일정수준 이상 수습이 될 것으로 보이고, 조중동 불매운동은 딱히 성공이라고 보기 힘든 수준에서 수습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병자군이 보는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안이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안은 엄청나게 많은 경우의 수가 있어서 쉽게 추정하기 쉽지 않으나, 적어도 병자군이 가지고 있는 가치 실현에 이 성공의 경험이 어떠한 작용을 할 것인가, 에 대한 병자군의 답안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되며, 오히려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병자군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북유럽형 복지 지향의 수정 사회주의라고 거칠게 정의할 수 있다.)

초기 촛불문화제에서는 한쪽에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또 다른 쪽에서는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끼리 상당한 수준의 토론이 벌어지고, 또 그러한 토론이 상대방의 입장을 큰 목소리, 많은 쪽수 등으로 깔아 뭉게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난 다음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등 다양한 가치관이 서로간의 타협점을 어떻게든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많이 보였고, 병자군은 그러한 모습들이야말로 차이를 상호 이해한 상태에서 타협점을 찾아가는 이상적인 형태의 '생활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니, 12시가 지났으니 어제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관찰된 모습은 차이의 '인정',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한 '타협'이 아닌, '저놈들과 나는 별개, 저놈들이 뭔짓을 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없음, 따라서 관심없음, 무시'의 형태로 다가왔다.

사실 병자군 역시 황우석 지지모임의 깃발을 보고 솔직히 그러한 반응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병자군은 지금 '왜 어제의 그 상황에서 그렇게 반응했을까, 왜 병자군은 스스로의 가치를 배반하는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일까.' 생각하며, 병자군의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그 나무의 가지 하나만 보고 전체를 평가한 스스로의 모습에 반성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현재 촛불집회에 저마다의 목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든 단체 및 개인들도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이 집회 안에 이렇게 다양한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차이들과 어떻게 타협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모여있는 이 같지만 다른 큰 덩어리들이 예정된 성공의 열매에 취해 서로를 차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반목하고 다투고 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저 보수언론들이 쏟어내는 '사회적 불안 예상됨'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되고, 이는 '역시 저들이 선견지명이 있었어'라는 형태의 또 다른 보수 이데올로기의 득세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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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병자의 인터넷정신병동 과거 버전에서 가져옴. (원문 포스팅 일시 : 2008/06/11 02:06)